골프상식 ㅡㅡ골프의 기원

by Raymond posted Jun 0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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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는 다른 운동과 달리 그 창시자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골프기원설은 크게 네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로마시대 시이저(BC100~44) 때 파카니카(Pila Paganica) 스코틀랜드성을 정복한 병사들이 야영지에서 쉬던 중 한쪽 끝이 구부러진 막대기로 새털로 된 공을 치며 즐겼던 놀이가 오늘날 스코틀랜드에 남아 골프가 됐다는 설이다.

  둘째로 기원전 네델란드 지방의 어린아이들이 실내에서 즐겨하던 코르프(kolf)라는 경기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13세기 무렵, 네덜란드에서 즐기고 있던 코르(chole)라는 빙상경기가 당시 양모를 중심으로 교역이 활발했던 스코틀랜드에 건너가서 그것이 골프(golf)로 발전됐다는 설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골프가 발전한 지역을 역추적해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당시 네델란드는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과 빈번한 교역이 이뤄졌다. 그 대표적인 항구로는 던바, 노스베리크, 매셀버러, 리스, 세인트앤드류스, 도너크, 에든버러, 뮤어필드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해당도시들에는 공통적으로 전통 깊은 골프장이나 컨트리클럽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해상무역을 통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간 네덜란드의 골프가 어째서 그 발상지인 네델란드에선 쇠퇴하고 오히려 스코틀랜드에서 번창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다음에 나올 스코틀랜드 기원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모래언덕, 산토끼, 양, 갈매기 등과 같이 골프장을 만들어가는데 필요한 자연조건을 풍부히 갖추고 있었으며 골프채(롱노이즈)의 원재료가 되는 나무도 스코틀랜드에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에서는 15세기에 모습이 사라져 버린 골프가 스코틀랜드에서는 크게 발전했던 것이다.

  한편 1296년 네덜란드의 런넨이라는 도시에서는 코르를 빙상이 아닌 교회의 뒤뜰이나 수확이 끝난 도로 등에 4홀 규모로 경기장을 마련해 놓고 행하기도 했다.

  위에서 말하는 코르는 롱노이즈라는 나무로 만든 스틱으로 코르크 모양의 볼을 치며 승부를 겨루던 경기이다. 경기방식은 빙상에서 할 경우 얼음구멍에 볼을 넣거나 볼을 말뚝에 맞히든가 해서 승부를 겨루던 것이다. 그러나 빙상이 아닌 육지에서 겨룰 때는 구멍을 파고 거기에 볼을 쳐넣는 비교적으로 단순한 게임이었다. 이는 당시의 교회 그림에도 남아있다.

  셋째로 스코틀랜드의 양치기 소년들이 양떼를 돌보면서 스틱으로 돌을 쳐서 들토끼의 구멍에 넣으며 즐기던 것이 골프의 시초됐다는 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사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든다. 하지만 이 스코틀랜드 양치기 소년들의 골프설도 그 정확한 근거를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현재로선 유럽대륙에 있던 골프와 유사한 놀이가 스코틀랜드에서 독자적으로 육성되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여하튼 골프의 기원은 확실히 어느 나라인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골프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꾸준히 발전돼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골프 융성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골프(Golf)'란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언어로 '치다'인 '고프(Gouft)'가 그 어원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지방의 지형이 골프장으로는 적격이었다. 스코틀랜드 북방쪽 해안에는 링크스(Links)라고 불리는 기복이 많은 초원이 있었다. 멋진 잔디와 잡목이 우거진 작은 언덕으로 이어진 지형은 골프코스로 하기에 적합했다. 더우기 이곳은 공유지여서 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한편 이 당시 들토끼가 많이 서식해 그들이 잔디를 깎아 먹어 평탄하게 된 곳을 그린(Green)이라고 불렀고, 그린과 그린을 연결하는, 양떼들이 밟아 평탄해진 넓은 길을 페어웨이(Fair way)라고 불렀다. 이 때의 그린이 바로 오늘날 퍼팅그린이 됐고, 양떼의 길은 페어웨이가 됐다.

  '페어웨이'란 항해용어로 '바다의 안전한 길', 즉 '바위 사이의 안전한 항로'라는 뜻이다. 이처럼 골프의 안전한 플레이 지대에 항해용어를 인용한 사실로 미뤄보아 해상무역과 골프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클럽, 즉 롱노이즈 등을 만드는데 쓰이는 재료인 나목들이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생산되었다는 점도 스코틀랜드 골프 융성설의 증거가 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 러시아나 캐나다에서 히코리목이 수입돼 클럽의 샤프트로 쓰였으며 높은 가공기술을 보유한 클럽제조 직공들도 많이 나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교전상태에 있어 활 등 무기를 만드는 직공들이 골프클럽도 만들어 많은 부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한편 이들은 클럽의 헤드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납을 넣는 기술을 개발했다. 또 볼을 맞히는 클럽헤드의 페이스면을 보호하기 위해 양의 뿔을 깎아 만든 인서트를 끼웠다고 한다.

  이러한 목동들의 놀이는 처음에는 서민들의 놀이로 성행했다가 골프금지령이 내려진 후로는 서민들이 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특권층인 왕족만이 할 수 있게 돼 오히려 나중에는 아예 궁중안으로 들어가 왕족들의 경기로 바뀌게 됐다. 여러 차례 금지령과 해제의 과정을 거듭하다가 국민의 권리가 점차 인정되면서 서민도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는데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4세로서 1520년에 퍼스(perth)에 활 제작자에게 골프채 한세트와 공을 구입해 골프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1567년에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이 그녀의 남편인 찰리경이 죽자마자 시튼하우스에서 골프를 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1592년 당시 리스(leith)에서는 일요일에 골프를 하는 것이 금지됐슴에도 불구하고 세인트앤드류스의 대주교는 지역주민에게 일요일에 골프를 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 제임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런던 근교인 블랙 히스(black heath)로 그의 신하들과 같이 갈 때까지는 골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그 후 빈센트 광장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의 운동장이 된 터틀 필드(tuttle field)에서 골프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이 터틀 필드는 학생들에게 업 필드(up field)라고 불려졌다. 이곳은 정규코스와 다르고 경기방식도 현재와 달랐다.

  넷째로 골프기원설에는 중국설이 있다. 본래 중국에서는 골프를 '츠이완'이라 불렀는데, 이미 943년에 간행된 남당(南唐)의 사서(史書)에 이 사실이 쓰여 있다는 주장이다. 환경(丸經)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골프경기자들은 서로 예의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플레이를 생각할 정도로 예전부터 신사의 경기였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 1991년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한 사범대학 체육학부 교수인 링홍링(凌弘嶸)은 호주의 한 학회지에 "골프의 원조는 중국" 이라는 글을 발표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편 근거로는 지금까지 공인된 골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5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2세가 국민들이 골프에 너무 몰두해 영국과의 전쟁에서 국가방위에 필요한 무예연습과 신앙생활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12세 이상 50세까지의 모든 국민들에게 골프를 금지한다' 는 국회기록인데 비해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골프에 대한 기록은 이보다 무려 514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다. 한편 원(元)나라 때 그려진 '추환도벽화(推丸圖壁畵)'에도 오늘날 골프 형태의 경기를 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들판에 그다지 높지 않은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사이로 해저드에 해당하는 냇물이 흐르는 가운데 네 명의 사나이가 경기를 펼치고 있는 장면의 그림이라고 한다.

  일찍이 고대 로마에서 행해진 골프의 사촌격인 '파가니카'는 목표까지 가장 적은 타수를 기록한 사람이 이기는 경기였는데, 기원 10세기 중국에서도 볼을 땅구멍에 집어넣는 시합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명대(明代)에 그려진 '선종행락도(宣宗行樂圖)'라는 그림에는 이와 같은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한다. 건장한 체구의 선종(宣宗)이 양손에 클럽을 쥔 채 몇번채로 샷을 할까 망설이며 전방을 응시하고 있다. 길 한복판에 심어진 나무들은 줄기의 중간에서 인위적으로 굽혀져 마치 창문처럼 둥근 공간을 이루는데 그 높이는 지상 10미터 가량에 위치한다. 한 타로써 그 공간으로 공을 날릴 모양이다. 이 그림의 한 쪽 구석에는 클럽을 들고 달려 오는 캐디, 구동(球童)의 모습도 보인다. '추환'은 본래 중국대륙에서 행해진 '보타구(步打球)'라는 경기가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943년까지는 문헌으로 고증되고 있다.

  12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중국에서는 당시 성행하던 추환을 위해 '환경(丸經)'이라는 골프규정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볼은 단단한 나무의 공이를 깎아 '권(權)'이라 불렀으며, 클럽은 '구봉(毬棒)'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1타는 '초봉(初棒)' 제2타는 '이봉(二棒)'이라고 했다. 그 룰에 의하면, 초봉은 오늘날 티 위에 볼을 올려놓고 칠 수 있는 것처럼 볼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이봉 이후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샷해야 되고, 홀아웃할 때까지 절대로 공에 손을 댈 수 없도록 했다. 

  한편 '환경(丸經)'에는 공이 놓여진 상태를 10가지로 분류했다. 그 중 '평(平)'은 평지, '요(凹)' '철(凸)'은 글자 모양 그대로이고, '앙(仰)'은 어게인스트, '준(峻)'은 다운 힐, '외'는 아마 OB로 짐작된다.

  한 홀의 기준타수는 홀 공히 파 3인데, 한 타 적게 쳐서 홀아웃할 경우 일주(一籌)를 얻게 된다. 말하자면 버디를 해야만 이길 수 있고 홀인원은 이주(二籌)인 것이다. 한편 경기가 백중해 그 날 해가 저물도록 승부가 나지 않을 때는 다음 날 재경기를 했다고 한다.

  '환경'에 쓰여 있기를, 플레이어가 서로 장시간에 걸쳐 한 타의 승패를 겨루는지라 선수들은 예의를 존중하였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플레이를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룰 해석은 엄격히 금했다고 한다.

  골프의 기원과 발상지는 과연 어디일까? 명쾌한 정답은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서를 불문하고 골프라는 것이 신사의 스포츠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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